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주앙 1세]] ==== 카스티야 왕국을 물리치면서 포르투갈 왕위를 굳힌 주앙 1세는 카스티야를 향한 지속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1396년 카스티야 왕국이 어린 국왕 [[엔리케 3세]]의 등극 이래로 귀족들간의 전횡과 내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바다호스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엔리케 3세는 귀족들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은 뒤 바다호스 요새에 구원군을 파견하는 한편 카스티야 함대에 포르투갈 해안을 공격하고 포르투갈 선박들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바다호스 포위를 중단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한 주앙 1세는 엔리케 3세가 어리고 병약하지만 절대로 만만한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그 결과 1402년 8월 15일 세고비야에서 10년간의 평화협약이 체결되었고, 1411년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받고 양국의 경계를 확정짓는 아일론 협약이 체결되었다. 주앙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북아프리카로 눈길을 돌렸다. 1415년 7월 25일 아들 [[인판트 동 엔히크]]와 함께 19,000명 가량의 포르투갈, 잉글랜드, 갈리시아, 바스크 기사와 군인으로 구성된 병력과 59척의 갤리선, 33척의 전투선, 120척의 소형 선박을 이끌고 [[세우타]] 공략에 착수했다. 8월 21일 세우타에 상륙한 원정군은 포르투갈군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비대를 손쉽게 제압하고 8월 22일 아침에 세우타 전역을 장악했다. 주앙 1세는 세우타에 세워진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하고 아내 필리파의 [[고해성사|고해]]사제인 아이마르 다우릴라크를 세우타의 첫번째 [[주교]]로 임명했다. 이후 주앙 1세는 3천 명의 장병에게 세우타 수비를 맡긴 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전 유럽에 자신의 승리를 널리 알렸다. [[마린 왕조]] 칼리파 우스만 3세는 1418년과 1419년에 세우타 수복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세우타는 시간이 지나면서 포르투갈 사략선들이 살레에서 그라나다와 튀니스까지 무슬림 선박들을 습격하는 주요 기지로 자리잡았으며, 기독교측 함선들은 이와 반대로 지브롤터 해협에서의 항해를 보다 안전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들 엔히크의 해상 탐험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카나리아 제도]], 포르투 산투,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를 발견하고 그 일대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확장 정책은 포르투갈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백성들은 처음엔 승리를 거듭하는 왕에게 열광했지만,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된 막대한 세금에 허덕이자 차츰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적진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세우타를 유지하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상당한 재원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코르테스를 자주 개최해 귀족과 상인들을 압박하여 기부금을 받아냈고, 장남 [[두아르트 1세|두아르트]]에게 법률 집행과 재정 관리를 맡겼다. 당대 작가들은 주앙 1세를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자애롭고 친절한 태도를 지닌 재치있는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특히 지식이 풍부했고 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지식과 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후대의 포르투갈 역사가들에 의해 "저명한 세대"( Ínclita Geração)라고 불리는 그의 아들들에게 이어졌다. 장남 두아르트는 시인이자 작가였고,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는 당대 왕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비세우 공작 [[인판트 동 엔히크]]는 해상 탐험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고 과학 기술에 과감히 투자했다. 딸 이자벨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한 뒤 포르투갈의 세련된 문화를 남편에게 소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